제 목 : | [인물] 조나단 스위프트의 업적과 평가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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목 차 : | 1. 개요 2. 초기생애와 교육 3. 무어파크 시절 4. 작가-종교인으로서의 활동 5. 아일랜드 은둔기 6. 말년 7. 참고문헌 본 자료는 워디안이나 한글 2002 이상의 버전에서만 확인이 가능합니다. 한글 97 이하의 버전을 보유하고 계신 회원님들께서는 구매에 앞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. <해피캠퍼스 자료관리팀> |
본 문 : | 초기생애와 교육 할아버지 토머스 스위프트는 헤리퍼드셔 구드리치의 교구신부로서, 청교도혁명 동안(1642~51) 변함없이 왕당파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. 아버지 조너선은 3형제와 함께 왕정복고 뒤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더블린의 킹스인 시종장이 되었다. 아버지는 1664년에 애비게일 에릭과 결혼했는데,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목사 딸이었다. 부모에게서 1666년 5월에 누이 제인이 태어났으나, 1667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 그의 어머니와 어린 누이, 그리고 뱃속에 있던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맡겨졌다. 스위프트는 아버지가 없이 삼촌들에게 의존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감을 느꼈다. 그러나 그는 교육을 못 받은 것은 아니어서 6세 때 당시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이던 킬케니 스쿨에 들어갔고, 1682년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. 이후 몇 년 뒤에 썼다가 그가 죽은 뒤인 1755년에 출판된 미완성 자서전 〈스위프트가(家) Family of Swift〉에서 그는 자신이 '가까운 친척들의 학대 때문에' 낙담하고 풀이 죽어 학업을 소홀히 한 까닭에 1686년 '특별한 배려'로 문학사학위만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. 실제 대학시절 성적은 평균 정도였으며, 그가 받은 학위도 학생의 성적이 규정에 약간 못 미칠 때 주던 것이었다. 그는 인문학 석사학위 신청자로 1689년 2월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머물렀다.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 뒤 더블린에 무질서가 만연하자 대학 당국은 학생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. 그는 잉글랜드로 피신했고, 어머니를 방문한 뒤에 주로 서리 주 무어파크에 있는 윌리엄 템플 경의 집에서 템플이 1699년 1월 죽을 때까지 지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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